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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공유지’에 ‘소외와 배제’의 울타리 치려는 자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26.06.20 11:52:19 조회 : 15
첨부 무제 11.001.jpeg (698.2K) DATE : 2026-06-20 12:20:46

‘AI 공유지’에 ‘소외’의 울타리 치려는 자들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세운 회사 애플에서 쫓겨났다. 이사회와의 권력 다툼에서 졌기 때문이다. 창업자가 자기 회사 밖으로 밀려나는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해서, 실리콘밸리의 비극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인공지능 새 모델 출시 잔치상에 스며든 망령

그런데 2026년 6월, 잡스의 추방보다 훨씬 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사람이 자기가 만들고 있던 인공지능에 손도 댈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 6월 9일, 인공지능 회사 ‘앤트로픽(Anthropic)’이 자기네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고 선언한 모델 둘을 내놓았다. ‘Fable 5’와 ‘Mythos 5’. 그런데 나흘 뒤인 6월 13일 오후 5시 21분, 미국 상무부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미국 시민이 아닌 모든 사람, 즉 미국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외국인은, 심지어 앤트로픽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까지도, 이 두 모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유는 '국가안보'. 그러나 편지에는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축제는 채 나흘도 넘기지 못했다. 출시를 자축하던 한복판에, 정작 그 모델을 만든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식탁에서 끌어내리는 명령이 들이닥친 것이다. 마치 잔칫상에 끼어든 불청객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는 연회 자리에 죽은 자의 망령이 나타나 흥을 깨뜨리는 장면이 있다. 영어권에서 즐겨쓰는 ‘잔치의 망령 (the ghost at the feast)’라는 표현은 거기서 나왔다. 즐거운 자리에 찾아든 불길한 그림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바로 그 망령이 이 축제에 앉은 것이다.

자료사진. 로이터=연합
자료사진. 로이터=연합

자기가 만든 것에 손댈 수 없게 된 사람

여기 그 망령에 가장 크게 데인 한 사람이 있다. 우리의 주인공인 안드레이 카파시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OpenAI를 처음 세운 창립 멤버였고, 테슬라에서 자율주행 인공지능을 밑바닥부터 만든 사람이며, ‘AI가 스스로를 점점 더 똑똑하게 개선하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 그 방법에 아예 그의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Karpathy Loop', 우리말로 옮기면 ‘카파시의 고리’라 부른다.

그는 2026년 5월 앤트로픽에 들어왔다. 맡은 임무는 분명했다. 인공지능(Claude)을 이용해서 다음 세대 인공지능을 더 빨리 만드는 것. 쉽게 말해, AI로 AI를 빚는 일이다. 카파시는 바로 그 '고리'를 돌리라고 영입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 시민이 아니다.

명령이 알려진 대로 시행된다면, 그 고리를 돌리라고 데려온 바로 그 사람이 정작 고리 한복판에 놓인 도구를 만질 수 없게 된다. 대장장이를 불러놓고 모루를 치워버린 셈이다. 이것이 ‘카파시의 역설’이다.

그런데 나는 이 역설이 한 사람의 불운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훨씬 오래된 문제, 철학자들이 ‘소외’라고 불러온 문제가 가장 최첨단의 현장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되살아난 사건이라고 본다.

                                안드레아 카파시
                                안드레아 카파시

‘양도’라는 한 단어의 두 얼굴

여기서 잠깐, 두 명의 사상가를 불러오자. 어렵지 않으니 따라와 주시길.

먼저 18세기 프랑스의 장 자크 루소.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한꺼번에 전부 ‘양도’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양도란 내 것을 남에게 넘긴다는 뜻이다. 루소의 답은 무서웠다. 권리를 통째로 넘겨주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권력 앞에서 오히려 힘없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세운 왕이 거꾸로 나를 내려다보는 뒤바뀐 경우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다음은 19세기 독일의 카를 마르크스. 그는 ‘소외’라는 말을 썼다. 공장 노동자가 온종일 물건을 만드는데, 정작 그 물건은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니다. 만들면 만들수록 자기와는 멀어지는 낯선 물건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내가 만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나를 짓누르는 현상’이 바로 소외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루소의 ‘양도’와 마르크스의 ‘소외’는 원래 같은 뿌리를 가진 말이다. 영어로는 둘 다 alienation, 프랑스어로는 aliénation이다. 한 쪽은 ‘넘겨준다’, 다른 쪽은 ‘낯설어진다’는 뜻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내 것을 넘겨주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 낯선 것이 되어 돌아온다.

이제 카파시를 다시 보자. 그는 자기 손으로 빚으라고 불려온 인공지능이, 완성되는 바로 그 순간 자기가 우러러봐야 할 낯선 존재로 변해버린 자리에 서 있다. 그가 만든 것이 그를 밀어낸다. 이보다 더 또렷한 소외의 그림이 있을까.

양떼가 사람을 쫓아내던 시절

그렇다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여기서 ‘인클로저(enclosure)’라는 역사 속 사건을 빌려와야 한다. 말은 낯설지만 그림은 단순하다.

16세기 영국. 원래 마을에는 누구나 함께 쓰던 땅이 있었다. 가난한 농민도 거기서 양을 치고 땔감을 구하며 먹고살았다. 이렇게 모두가 함께 쓰는 땅을 ‘공유지(commons)’라 한다. 그런데 양털값이 치솟자, 지주들은 이 공유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영어로 enclose, ‘인클로즈‘) 자기 양떼만 풀어놓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쓰던 땅에서 쫓겨났다. 함께 쓰던 것이 한순간에 몇몇 사람만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토머스 모어는 이를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탄했다.

인클로저의 논리는 늘 똑같다. 모두의 것을 울타리로 둘러싸 소수의 것으로 만든 뒤, 그것을 ‘질서’나 ‘효율’이나 ‘안전’ 같은 그럴듯한 말로 정당화한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인클로저가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번에 울타리가 쳐지는 공유지는 ‘지능’ 그 자체다.

16세기 영국의 인클로저. 모두의 땅에 울타리가 쳐졌다. 이제 그 일이 '인공지능'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필자가 AI로 만듦.
16세기 영국의 인클로저. 모두의 땅에 울타리가 쳐졌다. 이제 그 일이 '인공지능'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필자가 AI로 만듦.

인공지능은 누구의 것인가

생각해 보자. 거대 인공지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글을 먹고 자란다. 논문, 시, 소설, 프로그램 코드, 인터넷의 수많은 대화까지. 다시 말해 인류 전체가 함께 만든 지식의 결정체를 빨아들여 태어난 존재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어느 한 나라, 어느 한 회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동안 미국이 다른 나라를 막을 때 쓰던 수출 통제는 주로 ‘물건’에 관한 것이었다. 첨단 반도체 칩, 그것을 만드는 기계 같은 손에 잡히는 물건들. 그런데 이번 명령은 통제의 선을 칩에서 인공지능 모델 그 자체로, 더 나아가 그 모델에 접근하는 사람의 ‘국적’으로 옮겨버렸다. 통제의 대상이 물건에서 사람의 머릿속으로, 그리고 사람의 여권으로 넘어간 것이다.

게다가 그 명분조차 허술하다. 앤트로픽 자신이 이렇게 반박했다. 정부가 문제 삼은 위험은 아주 특수한 한 가지 경우에만 통하는 좁은 것이지 모든 안전장치를 뚫는 보편적인 위험이 아니며, 똑같은 방법이라면 수출 통제도 받지 않는 다른 회사의 인공지능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울타리를 치는 쪽의 이유는 늘 이렇다. 사후에 갖다 붙인 듯하고, 어떤 것은 막고 어떤 것은 봐주는 식으로 선별적이며, 모두를 위한 척하지만 실은 특정한 누군가를 겨눈다.

울타리의 속내를 드러내는 결정적 장면이 하나 더 있다. ‘Fable 5’와 ‘Mythos 5’는 사실 똑같은 인공지능이다. 다만 ‘Fable 5’에는 위험한 쓰임새를 막는 안전장치가 더 단단히 얹혀 일반에게 공개되고, ‘Mythos 5’는 그 장치 없이 허락받은 소수 기관에만 열린다. 쉽게 말해 같은 지능 위에 울타리 높이만 다른 두 판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명령은 그중 더 높은 울타리를 두른 쪽, 즉 더 안전하게 만든 ‘Fable 5’까지 외국인의 손에서 거둬들였다. 정말로 안전이 목적이었다면 가장 안전한 판본은 남겨두었어야 한다. 그러나 인클로저는 위험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른다. 울타리의 진짜 정체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위험을 차단하는 선이 아니라, 누가 가질 수 있고 누가 가질 수 없는지를 가르는 소유의 경계선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소외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여기서 마르크스의 가장 깊은 통찰 하나를 꺼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모든 사유재산을 없애자”고 했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그가 없애자고 한 것은 ‘남을 배제하는 소유’, 곧 울타리를 쳐서 남을 쫓아내는 인클로저로서의 소유다. 그가 그 자리에 세우려 한 것은 소유의 소멸이 아니라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되, 그 안에서 개인이 자기가 만든 것의 주인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빼앗긴 주인 자리를 다시 세운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 이 글의 매듭이 있다. 지능의 인클로저를 푸는 답은, 모든 것을 다시 국가의 손에 통째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루소가 경고한 또 한 번의 ‘양도’일 뿐이고, 소외를 고치는 척하면서 소외를 되풀이하는 일이다. 이번 국가안보 명령이 하는 일이 실은 바로 그것 아닌가. 모두의 것이어야 할 인공지능을 국가라는 더 큰 울타리 안으로 다시 거둬들이는 일 말이다.

진정한 답은 정반대 쪽에 있다. 함께 빚은 지능 위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 하나하나가 자기가 만든 것의 주인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카파시가 자기 손으로 만든 모델을 다시 만질 권리를 회복하는 것. 사소해 보이는 이 요구가 사실은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큰 원리의 가장 구체적인 한 점이다. 함께 만드는 것과 개인이 주인이 되는 것은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오히려 뒤엣것은 앞엣것의 완성이다.

비극보다 무서운 희극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고. 돈의 인클로저가 비극이었다면, 자기가 만들라고 고용한 인공지능에 접근을 금지당한 창조자라는 이 그림은 희극이다. 그런데 철학자 마르쿠제는 경고했다. 희극이 때로는 비극보다 더 무섭다고. 우스꽝스러움이야말로, 그 체제가 이제는 자기를 변명할 말조차 잃어버렸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맥베스』에는 또 이런 말이 나온다. 악마는 거짓이 아니라 '정직한 진실'로 우리를 지옥으로 이끈다고. ‘국가안보’는 정직한 걱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직한 걱정이 데려가는 곳, 곧 인류 모두의 지능에 국적의 울타리를 두르고 사람들의 권리를 또 한 번 낯선 권력에 넘겨주는 세계는, 결코 우리가 가려던 곳이 아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넘겨주기 이전의 우리 자신이다. 다시 말해, 빼앗긴 주인 자리, 곧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다.

앤트로픽은 이것이 오해이며 곧 접근을 되돌리겠다고 밝혔다.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클로저의 역사가 가르치는 단 하나의 교훈은 이것이다. 한번 쳐진 울타리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16세기에 사유지가 된 공유지가 끝내 다시 모두의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듯이.

망령은 이미 잔치에 스며들었다.

송종운 (사)평화와 먹고사는 문제 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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