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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
같이 읽어봅시다 - 이광수가 100년 전에도 그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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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나라를 팔아먹는 요설(妖說)에 대하여
식민지에 살고 싶은 자들 아베 정권의 교활한 도발에 맞장구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이 있다. 첫째, 이런 일은 우리가 못나서 벌어진 일이라고 호도한다. 둘째, 크게 보고 지혜롭게 대처해야한다고 설교한다.(물론 대안은 없다.) 식민지 시대에도 그랬다. 식민지는 국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의 침탈이고, 문화의 파괴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존감을 의존심, 노예근성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독립, 광복이 곧 식민성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베 정권의 도발은 씻어내지 못한 식민성을 씻어낼 기회라도 생각한다. 다행히 본색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자들이 있다. 거기에는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비판이 어려웠던 비판
사학사나 조선시대사 강의를 주로 맡았던 나는 한동안 기말고사 때 꼭 내는 시험문제가 있었다. 학기 초에 강의계획서를 설명하면서, 미리 기말고사 문제의 하나를 제시하여, 학기 중에 고민했다가 답안을 작성하라는 취지였다. 시험문제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비판하라'였다. 얼핏 보면 충분히 비판이 가능할 것 같았는데도, 학생들의 답안은 심정적인 비판 쪽에 가까웠지 논리적, 사실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나로서는 자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강만길(姜萬吉)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자리가 있었을 때 기말고사의 경험을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좋은 문제라는 데 동감하시면서, 다음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비교하여 서술하라는 방식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셨다. 역사학자이면서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 인물과 이광수를 비교하면 설득력 있는 답안이 가능할 듯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시도해보지는 못하였다.
"우리 탓이다"
이광수는 파리 평화회의(1919) 이후 국제연맹이 조직된 시대를 '개조(改造)의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제국주의 세계의 개조, 생존경쟁 세계의 개조, 남존여비 세계의 개조. 이런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근대 사상의 비전을 기조로 "이 시대 사조는 우리 땅에도 들어와 각 방면으로 개조의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 사람으로서 시급히 하여야 할 것 개조는 실로 조선민족의 개조외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조선 민족이 변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에 숱하게 변하였으되, 그 변천은 자연적이고 우연한 변천이지 목적의식적이고 통일적인 계획을 가진 변천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곧 원시 민족의 그것이었지, 문명을 가진 민족의 변천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아직 감옥에 있었던 1921년 봄, 임시정부의 대변인이었던 이광수가 귀국했다. 이광수는 수백만 명이 참가했던 3・1운동을 체험하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흔히 '문화 정치'라고 불리는 일제의 고등 술책이 작동하던 시기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일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민족을 구할 자 없다'는 명제보다도 '나만한 민족적 경륜을 가진 자는 없다'는 명제가 그에겐 너무도 크고 집요하였다.(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2>, 솔, 2008, pp.28~29) '괴벨스'의 양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910년 8월 강제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만 남기고 나머지 조선 언론을 통폐합한 장본인이다.(정일성,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지식산업사, 2005) 그는 이른바 민족동화 정책을 입안하여 실행하였는데, 이는 이광수의 '민족개조'와 식민지 '민족말살'이라는 사안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조선 정치사를 음모의 역사라고 불렀다. 음모에는 정쟁이 따르게 마련이었고, 조선의 정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악정으로 묘사된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첫째, 조선인에게 일본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한다. 둘째, 자기에게 이익이 따른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셋째, 통치에 만족하여 기꺼이 복종하게 하고 즐겁도록 하는 데 있다." 도쿠토미는 그렇지 않아도 좌절에 빠져 있는(<술 권하는 사회>를 보라.) 조선 지식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이광수는 보통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 8권을 선별하였는데, 도쿠토미의 <소호 문선>이 포함되어 있다. 1936년 이광수를 만났을 때 도쿠토미는 자기의 아들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후 이광수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검거되었다가 재판을 받는 도중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 개명하였다. 그리고 도쿠토미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내 자식이 되어달라는 선생의 말씀을 들은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 조선인은 앞으로 텐노오의 신민(臣民)으로서 일본 제국의 안락과 근심 걱정을 떠맡고 나아가 그 광영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민 수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야말로 텐노오 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짓눌린 자존감 이광수는 과거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조선인도 스스로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등, 수도, 전신, 철도, 윤선(증기선), 도로, 학교 ……. 즉 근대를 표상하는 문물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인이 세운 교육기관이라야 고등보통학교 몇 개에 불과하고, 산업기관이라야 자본 1천만 원도 못 되는 구멍가게 같은 은행 몇 개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의식에 그가 무실, 역행을 주장했던 목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지배하던 제국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근대 문명을 이루어갔다. 그 문명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은 달랐다. '문명'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는커녕 그 문명의 주인들에게 종속되어 버렸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주인들과 대등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어깨를 겨룰 수 있어야 했다. 이광수가 전등, 수도, 전신, 철도 등등 쭉 열거하는 것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 아니다. 바로 근대 '문명'이고 식민지의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식민지는 그렇게 생존을 위해 확보해야할 조건을 만들어가는 데도 결단을 요구하였다. 제국과 식민지는 결코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문명의 차이이며, 지배-피지배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노동은 제국의 자본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등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투항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투쟁을 선택하는 순간 대등해질 것이지만 위험하며, 그래서 투쟁하고 싶지만 마음뿐인 경우도 많다. 투항하면 실제로 대등해지지는 않겠지만 대등해졌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후자였다. 투항할 때는 대들지 않는다. <민족개조론>에 일제의 침략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투항이든 투쟁이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얘기하다 보면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왜 지금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고,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사정을 점검하는 일이다. 이광수도 <민족개조론>에서 그리하였다. 그 기억과 기억하는 방식이 곧 이광수의 역사론이 된다. 이 부분이 정교해야 투항이 투항처럼 보이지 않는다. 거꾸로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정교해야 침략과 지배가 침략이나 지배로 보이지 않는다. 배운 자의 함정, 냉소
이광수는 식민지 상황의 원인을 악정(惡政)이라고 했다. '조선민족의 쇠퇴의 책임은 그 치자계급―즉, 국왕과 양반에게 있다.' 정치를 문란할 것, 산업을 쇠잔케 한 것, 국민교육을 힘쓰지 아니한 것, 사회의 풍기와 인민의 정신을 타락케 한 직접의 책임이다. 자기 일신의 권세, 자기의 친척 붕우의 출세, 자기와 운명을 같이 하는 당파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공직자들, 이것이 조선의 악정이었다는 것이다.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타,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 조선 민족이 '금일의 쇠퇴'에 빠지게 한 원인이며, 그는 이런 견해를 자신의 '사론(史論)'이라고 했다. 그는 민족성이 원인이라고 했다. 여기서 국왕과 양반에 국한되었던 패망의 원인은 민족 전체의 책임이 된다. 투항하면서 침략이 빠지듯, 도덕을 말하면서 역사현실이 민족성으로 환원된 것이다. 그에게 조선은 역사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개혁정책, 민생정책, 문화와 사상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조선시대 이해는 역사에 대한 이해, 사론이 아니라 도덕론이다. 그 도덕론의 기조는 냉소이다. "멀리는 말 말고 이조사(李朝史)를 보건대 서로 속이고,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고 모함한 역사라 하겠습니다. 이조사와 같이 완인(完人)이 없는 역사는 아마 드물 것이니, 명망 있는 인물 중에 와석 종신한 사람이 몇 사람이 못 됩니다. …… 이를 민족적으로 보더라도 조선민족은 적어도 과거 오백 년간은 공상(空想)과 공론(空論)의 민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백 년 민족생활에 아무 것도 남겨 놓은 것이 없음을 보아 알 것이외다."
이게 어리석은 천재(?) 이광수의 조선시대사 인식의 결말이다. 투항의 논리, <민족개조론>은 그의 창씨개명과 청년들에 대한 참전 선동으로 귀결되었다. 투항을 합리화한 지식인은 이렇게 역사의 간신이 되었다.
출처 : 오마이뉴스(http://omn.kr/1k16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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